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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 수사의 1999 - 2000년 편지 2015-02-09
김학경




 

 

로제 수사의 1999 - 2000년 편지


 

1999-2000년 편지 (1)

떼제의 편지 삶을 아름답게 하고 활짝 피어나게 하며 내적 평화를 가져다주는 그런 무엇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우리가 신뢰라 부르는 것이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 각자 안에 가장 훌륭한 것이 단순 소박한 신뢰를 통해 자라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습니까? 그것은 어린이에게도 가능합니다.(2) 삶의 어느 시기에나 아픔과 버림받음,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미래는 너무나 불확실해서 용기를 잃어버리게까지 합니다. 그럴 때 어떻게하면 근심걱정을 떨쳐버릴 수 있겠습니까? 신뢰의 샘은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3) 님의 사랑은 용서이며 그것은 내적인 빛입니다.

신뢰하는 사람은 세계 곳곳에서 일자리가 없고 먹을거리가 없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습니다.(4) 이 시련은 우리에게 물음을 던집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의 삶에서 힘을 얻어서 여러 가지 책임을 감당하고 다른 이들과 더불어 세상을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길을 찾는 사람들 가운데 속할 수 있겠습니까?(5) 깊은 내면의 신뢰를 가질 때 우리는 책임을 회피하기는커녕 인간사회가 뒤흔들리고 무너지는 바로 그 자리에 꿋꿋이 남을 수 있게 됩니다.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실패할 때조차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신뢰가 있을 때 놀랍게도 우리는 아무 것도 차지하려 하지 않는 사랑으로 남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세상 곳곳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인류 가족의 분열을 치유할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뢰는 그 주변 사람들에게 삶을 아름답게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희망을 뿜어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6)

신뢰와 희망은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현존에서 솟아납니다. 부활하신 이후로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사십니다.(7) 더 나아가, 그분은 "예외 없이 모든 인간과 결합해 계십니다"(8)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결합해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며 각자를 바라보시는 그분의 눈길을 알지 못합니다.(9) 하지만 그분은 우리 각 사람 안에 마음이 겸손한 분으로 찾아와 계십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립니다. "너를 향해 열린 희망의 길을 알아보겠느냐? 그 길로 들어설 준비를 하느냐?"(10) 그럴 때 어떻게 그리스도께 이렇게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평생 당신을 따르고자 합니다. 하지만 저의 연약함을 아십니까?"(11) 복음을 통해 그분은 응답하십니다. "나는 너의 시련과 가난을 안다... 평생토록 신실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너는 가진 것이 없다고, 혹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는 부요하다.(12) 무엇으로? 항상 네곁에 계시는 성령으로 ...(13) 그분의 자비는 네 영혼의 그늘진 곳까지 비추어 준다."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는 흔들리지 않고 깨어있는 눈길이 필요하지만 이 신실함은 반대로 커다란 기쁨과 그윽한 평화, 더없이 밝음을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하느님과의 친교를 추구하는 사람은 성서의 가장 빛나는 대목 가운데 하나인 이런 말씀에 젖어듭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인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14) 신실되이 남기 위한 우리의 투쟁을 그리스도는 아십니다. 끊임없이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비워라! 네 두려움을 내게 맡겨라!" 그분은 우리를 고립에서 건져내어 교회라고 불리는 사랑과 친교의 공동체, 그 신비에 의지할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무엇보다 친교이심을 늘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 분은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하느님 안에서 사랑의 친교를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교회가 더 개방적으로 사람들을 맞이하고(15) 더 단순 소박하게 살아갈수록(16) 우리의 연약한 마음에 더 가까워집니다. 그럴 때 교회는 많은 말이 없이, 침묵 가운데서도, 남을 위해 그리스도를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발견하겠습니까? 놀랍게도 우리는 인간의 깊은 내면에서 어떤 존재를 향한 기다림, 친교를 향한 무언의 갈망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런 기다림 속에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느님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열어 드리고 싶은데 기도할 때마다 자꾸 분심이 들고 산만해집니다"(17) 복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느님은 네 마음보다 크시다."(18)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거의 아무 것도 없이 기도한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19) 모두에게 하느님은 다정하게 맞이하시는 그런 아버지가 아니십니까?(20)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드린 마지막 기도는 우리에게 그것을 상기시킵니다. "아버지, 다신 손에 제 영혼을 맡기나이다."(21) 혼자서 기도하는 것은 때로 어렵습니다.(22) 하지만 공동 기도가 얼마나 아름다운 지를 잊지 맙시다. 짧고 단순한 말마디와 찬송과 노래와 표현되는 공동기도는 영혼의 깊은 곳에 와 닿습니다.(23) 그리스도를 따라 걷는 사람은 하느님과 가까이 있는 것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 곁에 머뭅니다. 기도는 인간의 마음밭을 일구는 조용한 힘입니다. 그것은 수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시련과 악의 세력 앞에 굴복하지 않게 합니다. 우리는 없어서는 아니 될 자비심의 힘을 기도에서 길어냅니다.(24)

오롯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자신을 내맡기며 온 삶을 바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해야할 선택과 결정이 있습니다. 어떤 결정 말입니까? 자신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감사가 솟아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 감사하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바탕이 되는 태도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항상 새로 피어나게 하시는 평온한 기쁨입니다.(25) 그것은 찬양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사람들과 그들의 바램을 희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려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삶을 아름답게 하는 복음의 실상을 감지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신뢰, 찬양하는 마음, 무한히 넓은 마음, 늘 새로워지는 기쁨...(26) 신약성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런 확신을 줍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 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믿고 있으며 말할 수 없는 기쁨 으로 넘쳐 있습니다. 이 기쁨은 여러분을 이미 변모시킵니다."(27) 만약 주저의 안개가 솟아나면 우리는 놀랍게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만큼은 아니더라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가장 분명한 것이 당신께 드리는 아주 겸손한 신뢰를 통해 자라납니다."

4세기에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썼습니다. "여러분 안에서 평화의 작업을 시작하여 자신이 일단 평화로워졌을 때 다른 이들에게 평화를 전할 수 있게 하십시오."(28) 마음의 평화는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에 마치 새로운 탄생과 같습니다.(29) 그런 평화를 찾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가서 화해하여라."(30) "먼저 가라"이지 "나중으로 미루라"는 말씀이 아닙니다.(31) 매일 매일 화해가 구체화되는 그런 삶보다 그리스도를 전달하는 데에 더 나은 길이 있습니까?(32) 화해하는 것은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며... 그것을 삶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비롭고 선한 마음 안에 마무리 위해 깨어있는 것입니다.(33)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그대 삶으로 보여 주십시오!(34) 사랑이 없다면, 용서가 없다면, 그 누구에겐들 미래가 있겠습니까? 화해가 없다면 지상의 평화에 어떤 미래가 있겠습니까? 서로 긴밀히 연결된 복음의 실상인 기쁨과 단순 소박함이 없다면 어떻게 신자들 사이에 서 뿐 아니라 비신자들에게까지 용서의 정신을 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걱정을 몰아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그렇습니다. 그분안에서 기쁨을 찾으십시오!"(35)

 

 



주 석 (1) 왜 이 편지는 1999년에서 2001년까지 입니까? 그 누구도 3천년기로 들어가는 이 때 잠시 반짝이다 사라지는 불을 지피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불꽃은 저절로(의미없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2000년에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인류 가족의 다가오는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어린이들이 삶의 기쁨을 발견하기 위해 신뢰 가득한 눈길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가를 우리가 알 수 있다면... 다정하게 사랑받고 용서받는다는 것을 어린이가 마음으로 알때 그것은 일생을 가는 평화의 샘이 될 수 있습니다.

(3) 1요한 4,8.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성 요한의 말을 주석하면서 7세기의 그리스도 사상가 니니베의 이사악은 이렇게 썼습니다. "하느님은 오로지 사랑만을 주신다." 이것은 정말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비참도 두려움도 불안도 야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전쟁도 대형참사도 자연재해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 모두에 그분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무고하심입니다.

(4) 국제 연합에 따르면 세계의 군사비는 매년 8천억~9천억 달러에 달합니다. 절대 빈곤에 처한 3억명에게 최소한의 거주와 식수, 그리고 위생 시설을 갖추는데 1천 3백억 달러면 족한데 말입니다.

(5) 우리 떼제 공동체의 성소에는 언제나 두 가지 열망이 있었으니, 개인기도와 공동기도의 아름다움을 통해 내적 생활을 엮어 나가는 것과 동시에 세상을 좀더 살만한 곳으로(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책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6) 과학의 발견과 새로운 기술은 일찍이 유래가 없이 급성장한 인류에 봉사할도록 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묵상을 바탕으로 하는 내적 생활에, 모든 사람사이의 화해를 이룰 수 있는 활력에, 단순 소박한 삶과 나눔에 있습니다.

(7)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그들을 절대로 혼자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성혈을 보내주실 터인즉, 그분은 협조자, 위로자로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실 것이다"(요한 14,16).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 동안 제자들 곁에 계셨던 것처럼 그분은 성령을 통해 오늘날 우리 곁에 똑같이 현존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같은 분의 현존이십니다우리가 죽을 때 성령은 영혼을 떠나지 않고 영원의 삶 속에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8) "기쁨과 희망"(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에서, 이 직관은 다가오는 여러 해 동안 온 인류를 향한 사목에 길잡이가 될 수 있겠습니다.

(9) 언젠가 방글라데시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 우리 공동체의 형제들을 방문했을 때 빈민가에서 회교 신자들과의 만남에 초대된 적이 있습니다. 이 회교신자 가운데 한 사람이 밤이 이슥할무렵 나를 배웅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인간은 모두 한 분의 같은 스승을 모시고 있지요. 이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비밀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사람들은 그걸 발견하게 될 거예요."

(10) 왜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었을까요? 그런 엄청난 신앙의 쇠진이 없었다면 우리 공동체가 일년 내내 세계 곳곳에서 모여오는 젊은이들을 맞이하는 데 지금처럼 모든 힘을 기울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1962년부터 남모르게 동유럽 나라들을 찾아가 젊은이들을 만나서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이해하려고 노력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습니다. 떼제에서건 여러 해전부터 살고 있는 다른 나라에서건 우리는 무엇보다도 경청하는 사람이 되고자 희망하지 결코 영적인 지도자가 되려 하지 않습니다.

(11)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기 위해서는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와 일치하려는 열망으로 가득찰 때, 우리는 이미 그분께 속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4세기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대가 하느님을 알기를 열망한다면 이미 믿음을 가진 것이다"고 갈파했습니다.

(12) 묵시록 2,9

(13) 7세기에 증거자 막시무스 성인은 "성령은 어떤 사람도 떠나지 않으신다"고 썼습니다. 성령이 자신들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성사를 통해 아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아직 모르거나 현세에서 알지 못할지라도 내세에서 발견하게 될 사람도 있습니다.

(14) 2 디모 1,7. 절제심과 마음의 평화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위해서도 참으로 필요합니다.

(15) "축복한 빵"은 이런 열린 환대의 표지가 됩니다. 어느날 그리스도께서 빵 다섯개를 축복하시고 모든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마태 14,13-21 참조). 바로 여기서 아주 오래된 이 전통이 생겨났으니 성찬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그들 가운데 성찬을 받아 모시지 않는 이들에게 이 축복된 빵을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16) 만일 단순 소박한 삶이 활기 없는 극기 생활과 동일시된다면 어떻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단순 소박함의 정신은 평온과 기쁨의 표징에서 또 경쾌한 마음 안에 드러납니다. 삶을 단순 소박하게 함은 적은 것을 가졌더라도 그것을 창조의 소박한 아름다움 안에 배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도 나눌 것이 너무 적다고, 믿음이 너무 작고 가진 물질이 별로 없다고 적정하지 않기를! 이 적은 것을 나눌 때 하느님은 넘치도록 관대한 마음을 주십니다. 다함이 없도록 말입니다.

(17)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데 왜 굳이 청원의 기도를 드리는가 하는 물음이 거듭 제기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신비에 빛을 던져 주시니 하느님께서 그분의 마음의 지향을 다 아셨지만 그리스도는 친히 말씀으로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18) 1 요한 3,20

(19) 동방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평생토록 알아들을 듯 말듯한 목소리로 숨결에 맞춰 예수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을 거듭 거듭 부름으로써도 충만한 친교에 이르게 됩니다.

(20) 하느님의 다정함이 가장 아름답게 묘사된 것 가운데 하나가 탕자의 비유에서입니다(루가 15, 11-2).

(21) "아버지, 당신 손에 제 영혼을 맡깁니다"(루가 23,46)라는 예수의 이 말을 어떤 이들은 매일 잠자리에 들기전에 되새깁니다.

(22) 만일 우리의 기도가 공허하게 느껴진다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도록 내맡깁시다. 4세기에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이 말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마음의 소리가 있고 마음의 언어가 있다... 우리의 입술이 닫혀 있고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 앞에 열려 있을 때, 이 내적인 소리가 바로 우리의 기도이다. 우리는 침묵하고 우리의 마음이 말한다. 인간의 귀에가 아니라 하느님께, 하느님은 그 소리를 들으신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말라."

(23) 우리 보금자리에 방 한구석을 이용해 성화와 촛불 등으로 아무리 작더라도 아름다운 기도의 공간을 꾸밀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스스로 노래할 수 없을 때에 기도에 도움이 되는 음악이 담긴 카세트를 듣기도 합니다.

(24) "나는 남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라고 말하면서 가슴아프게 생각하는 환자나 노인이 있습니까? 그들의 기도가 하느님께 받아들여지며 기대하지 않았던 응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그들은 잊었습니까?

(25) 예수께서 이 지상에서 느끼셨던 기쁨을 우리 안에서 뒷받침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쳐서 말씀하셨다..."(루가 10,21)

(26) 하느님께 대한 신뢰 안에서 나아가고 내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침묵 가운데 몇 마디 짧은 기도를 언제고 거듭 반복하면 좋습니다. 예를 들면 "만사에 마음의 평화를, 기쁨, 소박, 자비를", "예수, 나의 기쁨, 나의 희망, 나의 생명", 혹은 "하느님, 당신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용서와 현존은 우리 안에서 드맑은 찬미가 솟아나게 합니다.", 혹은 "예수 그리스도여, 내 어둠이 내게 속삭이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사랑을 맞이하게 해 주소서."

(27) 1베드 1,8. 신약성서의 이 대목은 2천년전부터 읽혀집니다.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찾아오셔서 우리 의지로도 어쩔 수 없는 가장 모순적인 부분까지 비추어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안에 당신 얼굴의 반영을 놓아주시며 우리를 근심케하는 우리 모습을 '변모시켜'주십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2베드 1,19) 그리스도께 우리를 맡겨 드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눈에 띄지 않는 내적인 변화, 존재의 "변모는 우리 삶 전체를 통틀어 계속됩니다.

(28) 14세기 초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 사로프의 세라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적 평화를 얻어라. 그러면 네 주위의 수천명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29) 사도 바울로는 거기에 우리를 초대합니다."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주시기를 빕니다."(필리 4,7)

(30) 마태 5,24

(31) 만일 우리가 화해의 시간을 놓쳐버린다면...? 화해가 없이 교회라고 불리는 이 비길데 없는 사랑의 친교에 어떤 미래가 있겠습니까?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화해하라는 성소는 '에큐메니즘(교회 일치 운동)이라 불립니다. 비록 교회일치의 성소가 괄목할만한 대화와 교류를 자극했지만 "먼저 가서 화해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간에 서로 대칭되고 평행적인 길이 생기도록 버려두어 하나가 되기 위한 어떤 변화도 내적으로 불가능하고 화해에 필요한 힘을 소진하게 된다면 교회 일치 운동은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이것은 마치 열차가 나란히 달리다가 가끔씩 멈추어 서로 잠시 만난 뒤 각자 자기 열차를 타고 길을 계속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화해를 뒤로 미루는 교회일치 운동이라면 모르는 사이에 헛된 희망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누가 감히 젊은 세대들을 헛된 꿈으로 인도할 수 있단 말입니까? 교회 일치의 성소가 화해로 구체화되지 않을 때 아무 결과도 낳지 못하고 불꽃이 꺼져 버립니다.

(32) 과거에 받은 상처의 기억만큼 오래가는 것도 없습니다. 이 기억은 여러 세대에 걸쳐 전달되기도 합니다. 용서와 화해는 우리로 하여금 이 기억을 넘어서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33) 우리 각자가 가장 담대한 화해의 모험을 감행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서로 화해할 때 우리의 마음이 차츰 변화됩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복음을 말합니다.

(34)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살려서, 4세기.

(35) 필리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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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고백
나를 철들게 한 나의 할머니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