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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권위 부정하고 성경 중심 주장한 종교개혁자 " 마틴 루터" 2015-06-16
김학경


 

 

 

 

 

 

교황 권위 부정하고 성경 중심 주장한 종교개혁자

" 마틴 루터"


 

면죄부 판매 등 중세교회 타락

중세 그리스도교의 개혁을 주도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그러기 전에 그가 등장하게 된 역사적 맥락을 잠깐 짚어보기로 하자. 중세 교회는 적어도 신학적인 면이나 영성면에서는 지극히 활발하였다. 12, 13세기에 유럽 전역에 대학들이 생기고 이 대학들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이 신학이었다. 이 때 활동하던 신학자들을 스콜라 신학자(Scholastics)라 하는데, 이들은 ‘신앙’과 ‘이성’(理性)을 종합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이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를 꼽을 수 있다.

이탈리아인 안셀무스는 그의 유명한 말 “알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에서 보이듯이 신앙이 지식의 전제 조건으로서, 믿어야 알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또 신의 존재를 이론으로 증명하려 했다. ‘우리는 모두 완전한 신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완전하기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하는 식으로 논증하려 했다. 이를 ‘존재론적 논증’(ontological argument)라 한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를 꼽는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를 드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일 것이다. 필자도 대학 다닐 때 라틴어 강독으로 그의 책 『신학대전』(Summa Theologiae)를 보고 세상에 인간으로 어찌 이런 책을 쓸 수 있을까 감탄한 경험이 있다. 이 책에는 신학적인 모든 물음을 ‘우리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일목요연하면서도 일관된 구조로 하나하나 설명·논증하고 있다.
 

위클리프·후스 등 개혁가 처형

아퀴나스도 신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하려 했는데, 그 중에서 잘 알려진 것 두 가지는 이른바 ‘우주론적 증명’(cosmological argument)과 ‘목적론적 증명’(teleological argument)이라는 것이다. 우주론적 증명은 “세상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야 존재한다. 그 원인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따져가서 최초의 원인(first cause), 혹은 ‘원인되지 않은 원인’(uncaused cause)을 찾는다면 이것이 바로 신이다.”하는 것이다. 목적론적 증명이란 “인간의 눈 같은 것을 보라. 세상의 모든 것이 아무렇게나 된 것이 아니라 일정한 목적을 위해 일정한 질서,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이렇게 설계한 존재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신이다.” 하는 것이다. 물론 18세기 칸트가 나와서 ‘순수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을 이렇게 이성의 한계 내에 놓고 증명할 수 없는 것이라 반박한 이후 이런 논증을 절대적인 논증이라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스콜라 신학의 시대적 제약성과 한계를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루터의 95개 조항 폭발적 반응

이런 신학적 발달과 함께, 전에 우리가 살펴본 마이스터 엑카르(Meister Eckhart, 1260-1327)트 등 신비주의자들의 가르침도 있었다. 그 외에 『예수를 본받아』(Imitatio Christi)를 쓴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Kempis),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을 쓴 이름 모르는 저자 등 많은 신비주의자들이 나타났다.이런 신학적 노력이나 신비주의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일반적 상태는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특히 교황들이 절대 권력을 가지고 행사하면서 권력남용, 부패 등 여러 가지 부작용이 따르게 되었다. 한 때는 본부를 프랑스 아비뇽(Avignon)으로 옮기고, 교황이 둘이 되는 일까지 있었다.

15세기 인문학이 발달되고 특히 인쇄술이 발달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 말로 번역된 성경을 직접 읽고 초대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를 비교하면서 현재 로마가톨릭교회의 불합리성에 불만을 품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십자군에 참가했던 군인들, 중국까지 갔다온 마르코 폴로, 그 외에 콜럼부스나 마젤란 등의 항해사들이 가지고 돌아온 딴 세상의 이야기가 가톨릭교회의 관행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해주었다.
 

사제 권위 부정…저항 ‘불 당겨’

더구나 교회는 베드로 성당 건축 등 여러 세속적인 일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면죄부(indulgences)를 파는 등 여러 가지 돈이 될 사업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교황은 성인들이 쌓아놓은 공덕의 창고를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기에 면죄부를 사는 사람들에게 여기 싸인 공덕을 무한으로 나누어 줄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이었다. 그 외에도 영세, 혼례, 장례 등 교회가 하는 집례에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교회의 이런 행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영국 옥스퍼드의 성경번역자 위클리프(1320-1384), 보헤미아 사람 후스(1374-1415) 등이 그 선구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모두 화형에 처해지는 등 개혁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들과 달리 ‘적절한 시간, 적절한 장소’에 나타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이 바로 독일 비텐베르그(Wittenberg) 대학에서 성경을 가르치던 젊은 신학자 마틴 루터였다. 그는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소원대로 법학을 공부하다가 어느 날 천둥번개를 만나 성직자가 되기로 서약, 법학을 포기하고 1505년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했다. 수도원에서 엄격한 수행을 하면서도 영적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기의 영적 필요를 채워주지 못한다고 하여 배격했다. 1507년 사제로 서품을 받고 1513년부터 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성경의 시편과 바울 서신들을 가르치면서 거기서 비로소 영적 안식처를 찾을 수 있었다.

시편-바울서신에서 영적 안정찾아

한 번은 로마로 여행했는데, 그 때 로마에 있는 사제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예수의 청빈하고 겸손한 생활과 너무나 다름을 발견, 교회가 타락했다는 확신을 굳히게 되었다. 그는 교회에서 하는 일 중에서 옳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95개 조항’으로 적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교회 문에다 못 박았다. 못 박는 망치소리가 그렇게 폭발적일 줄은 루터 자신도 몰랐다. 독일 각처에서 95개 조항을 적은 문서의 사본을 보내달라는 요구가 쏟아져 들어와 비텐베르그 대학 출판소에서는 미처 그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없을 정도였다.

개혁의 요구가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물론 처음에는 교회 내에서 개혁을 이루자는 것이지만, 점점 로마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하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 소식은 곧 교황에게까지 들어갔다. 교황은 처음 이를 묵살하다가 1520년 루터에게 로마로 출두해 재판을 받으라고 명했다. 루터는 이를 거절했다. 1521년 보름즈(Worms)에서 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앞에서 열린 회의에 불려와 다시 그의 저작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이로 인해 교회로부터 영원히 파문당했다. 프레데릭이라는 제후의 도움으로 그의 성에 피신,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에 몰두했다.

 

독일·스칸디나비아·북미 전파

루터는 교회가 가르치는 것처럼 면죄부를 살 때 돈이 상자 밑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순간 죽은 친척의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로마인서 1:17에 쓴 것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강조했다. 교회가 믿음과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데 반해 루터는 이른바 ‘믿음으로만’(sola fide)을 강조했다. 진정으로 부모의 사랑을 알게된 아이는 저절로 선한 행위의 삶을 살게 되는 것과 같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참된 믿음만 있으면, 좋은 행위는 자연적으로 따라온다고 보았다.

루터는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것이 오로지 사제를 통해서만이라는 교회의 주장을 배격하고, 누구나 스스로 사제가 되어 직접 하느님께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만인 사제직’(priesthood of all believers)을 주장하기도 했다. “죄의 용서는 그리스도와,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갖게 되는 직접적인 개인적 관계를 통해 영혼 내면에서 생겨나는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참된 교회란 어느 특정한 조직이라기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모든 신도들의 공동체라고 보게 되었다. 또 최종의 권위는 교회의 전통이나 교황이 아니라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 주장했다. 루터는 이처럼 교회 안에 있던 사제주의적 권위와 위계질서를 무너뜨렸다는 의미에서 ‘현대성’의 문을 연 셈이다.

루터와 그를 따르던 개혁자들은 1529년 스파이어 회의의 판결에 저항(protest)했기 때문에 그의 개혁운동을 프로테스탄트(저항자) 운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루터는 신부들이 결혼할 것을 권장하고 스스로도 수녀였던 캐서린 폰 보라와 결혼을 했다. 그의 개혁운동은 독일, 스칸디나비아 제국으로 들어가고 이런 나라에서 이민 간 사람들과 함께 북미로도 퍼졌는데, 미국 위스콘신과 미네소타 주,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 많이 몰려 있다. 한국에도 루터교가 들어와 초기 ‘루터란 아워’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많이 알려졌다.

오로지 믿음 뿐…정토종과 상통

루터의 사상은 여러 면으로 불교 아미타불의 원력(願力)을 믿는 믿음으로 극락왕생한다는 정토종의 사상과 상통하는 바가 많다. 특히 일본에서 조도신슈(淨土眞宗)를 창시한 신란(親鸞, 1173-1226)과 닮은 면이 너무 많아 루터와 신란을 비교하는 저작이 많이 있다. 신란도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염불 자체도 실행하기 힘들다고 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아미타불의 원력에 절대적으로 의탁하는 절대 신앙뿐임을 역설하고, 믿음을 갖는 자체도 공덕으로나 정토에 이르기 위한 조건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할 정도로 ‘믿음만으로’를 강조했다. 물론 신란도 승려들의 결혼을 권장하고 스스로도 결혼했다.

반유대-과학반대 등 흠결도

루터는 반유대인 정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그 당시 새로 등장하는 자연과학적 발견을 반대하는 등 여러 가지로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프로테스탄트 정신’과 이로 인한 그의 공헌은 모두의 칭송을 받아 마땅하다. 상당수 문명비평가들은 현재의 한국 개신교 상태가 종교 개혁 직전의 가톨릭 상태와 비슷하다고 보는 이들이 있어, 그의 개혁정신은 오늘날 다시 그 위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불교 쪽은 어떨까?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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